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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남주의 38선
    가져온 글 2006. 4. 19. 10:57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戰士詩人 / 김 남주

     

     


     ▲ 1994년 2월 지병인 췌장암으로 숨진 김남주 시인의 장례식이
    고인의 가족과 재야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詩 : 김남주 (1946~1994)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낮게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 맨 허리에도 있고
     
    제 노동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휘여진 등에도 있다
     
    높게는
     
    그 허리 위에 거재(巨財)를 쌓아올려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부자들의 담벼락에도 있고
     
    그들과 한패가 되어 심심찮게
     
    시기적절하게 벌이는 쇼쇼쇼
     
    고관대작들의 평화통일 제의의 축제에도 있다
     
    뿐이랴 삼팔선은
     
    나라 밖에도 있다 바다 건너
     
    원격조종의 나라 아메리카에도 있고
     
    그들이 보낸 구호물자 속의 사탕에도 밀가루에도
     
    달라의 이면에도 있고 자유를
     
    혼란으로 바꿔치기 하고 동포여 동포여
     
    소리치며 질서의 이름으로
     
    한강을 도강하는 미국산 탱크에도 있다
     
    나라가 온통
     
    피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
     
     

     

    김남주 (金南柱 1946 ~ 1994)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봉학리에서 태어났다.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 2학년 때 획일적인 입시위주 교육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1969년 검정고시로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뒤 3선 개헌 반대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하였으며,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하였다.

     

    8개월 복역 후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창작과 비평》 1974년 여름호에 《잿더미》와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듬해 광주에서 사회과학 전문서점 카프카를 열었으나 경영난으로 1년만에 문을 닫고, 1977년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광주에서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활동하다 사상성 문제로 1978년 서울로 피신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하였다.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4년 수감중 첫 시집 《진혼가》가 출간되었다.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만에 석방되었으며, 이듬해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결혼하였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건강상의 문제로 사퇴하였고,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여 망월동의 5·18묘역에 안장되었다.

    스스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라고 칭했듯이 그의 시는 강렬함과 전투적인 이미지들이 주조를 이룬다. 유장하면서도 강렬한 호흡으로 반외세와 분단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노동문제 등 현실의 모순을 질타하고 참다운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시집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사상의 거처》(1990),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 등과 시선집 《사랑의 무기》(1989), 《학살》(1990), 산문집 《시와 혁명》(1991),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 1978)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1991)과 단재문학상(1992), 윤상원문학상(1993), 민족예술상(1994)을 받았으며, 2000년 5월 광주 중외공원에 《노래》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제막되었다.

     

     

    "  자      유  "       詩 : 김 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민주주의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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